깨지고, 구르고, 앞이 보이지 않고…‘태양은 없다’를 외치면 또 어떤가 [리뷰]

이정재 연출작 ‘헌트’ 흥행, 영화 ‘태양은 없다’로 이어진 관심 공감 백배 대사, 감각적 음악 활용으로 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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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삼성 픽쳐스

배우 이정재가 감독으로 나선 첫 영화 ‘헌트’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개봉 나흘 만에 100만 관객을 넘어서더니, 이제는 당당히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고 섰다. 이 열기를 이어가기 위해 정우성과 이정재 두 주연배우는 작품 홍보에 동분서주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언급된 두 사람의 사적인 친분 덕에 그들이 처음 호흡을 맞춘 영화 ‘태양은 없다’ 역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1999년 1월 개봉한 ‘태양은 없다’는 지난해 4월 CGV를 통해 재개봉되며 ‘세기말 감성’을 그리워하던 팬들을 추억에 젖게 만들었다. 최근엔 15일 기준 OTT플랫폼 웨이브와 티빙 인기순위에서 각각 2위와 3위에 오르는 등 최신작 ‘헌트’ 만큼 뜨거운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제는 널리 쓰이는 ‘브로맨스’란 말을 처음 탄생시킨 게 바로 이들이 아닐까 싶은, 그 서사의 시작으로 지목되는 영화 ‘태양은 없다’를 소개한다.

시작부터 좌절이다. 링 위에 쓰러진 권투선수 도철(정우성 분)의 앞이 흐려진다. 경기 직후 라커룸에서 자신을 쓰러트린 후배와 몸싸움을 벌인 도철은 그길로 권투를 그만둔다. 어딘가로 향하는 지하철, 그는 흘러내리는 코피를 보고도 놀라긴커녕 짜증스럽게 닦아내고 만다.

사진=삼성 픽쳐스

홍기(이정재 분)는 또 어떤가. 구두에 묻은 먼지 하나 용납 못하는 그는 병국(이범수 분)에게 끌려가 빚 독촉과 함께 매를 맞는다. 하지만 풀려난 이후 빚 걱정보다는 “얼굴을 때리고 지랄이야”라며 투덜거리는 모습으로 관객들이 실소를 터트리게 만든다.

권투를 그만둔 도철이 찾아간 흥신소에서 먼저 일하고 있던 홍기. 늘 “돈이 최고다”를 외치는 홍기와 아직도 링 위에 올라 화려한 우승을 꿈꾸는 도철은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구석이라곤 없다. 전 방위 사기꾼 홍기가 흥신소 사장을 배신하고 뒷돈을 챙긴 사실이 들켜 해고 당하자, 대뜸 도철까지 흥신소를 그만둔다. 이렇게 둘은 아무 계획도 없이 길을 나선다.

허구한 날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던 홍기는 미미(한고은 분), 도철과 함께 찾은 행사장에서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린다. 술에 취한 도철이 연예 관계자와 마찰을 빚고, 말리던 홍기에게 불똥이 튄 것.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그럼에도 홍기는 도철을 데리고 자리를 피하려 한다. 하지만 이때 도철이 부상을 입는다. 이후 도철을 대신해 합의금을 받아낸 그는 합의금의 절반을 뚝 떼준 도철을 배신하고 나머지 반과 친구의 통장까지 훔쳐 모습을 감춘다. 도철은 돈도, 친구도, 행사장에서의 실수로 사랑까지 잃을 위기에 놓인다.

언제나처럼 돈이 생기자 가장 먼저 경마장으로 달려간 홍기는 또 언제나처럼 돈을 모두 잃는다. 그리고 다시 마주한 병국의 패거리. 홍기는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제 발로 유치장에 들어가고, 거기서 나오기 위해선 도철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긋지긋하지만 두 사람은 다시 함께하게 된다. 처음 만날 땐 지저분한 단칸방이라도 있었지만, 이제 이들은 이불 한 장 없는 체육관에서 겨우 눈을 붙인다.

도철은 겨우 다시 시작한 권투가 뜻대로 되지 않고, 미미와의 사랑도 끝을 향해 간다. 홍기 역시 이제는 대놓고 목숨까지 위협하는 빚 독촉에 다급해져 보석상을 털려는 무모한 시도까지 한다. 어쩌면 당연했던 절도 실패 후 겨우 도망친 두 사람은 어느 바닷가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다. 이후 서울로 돌아온 이들 앞의 현실은, 여전히 처참하다.

사진=삼성 픽쳐스

‘태양은 없다’는 ‘비트’로 영화계에 강렬한 존재감을 알린 김성수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이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정우성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는 동시에 ‘잘생겼지만 연기력은 그다지’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던 이정재를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으로 이끌었다. 당시 이정재가 세운 최연소 남우주연상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정재 본인도 이 작품을 촬영하며 비로소 연기가 즐겁다는 것을 배웠다고 하니, 영화에서 보여준 그의 후안무치한 모습은 작품에 그만큼 몰입했다는 증거일지 모르겠다.

영화는 당시만 해도 배경에 불과했던 음악을 장면의 일부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CF 등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서쳐스의 노래, ‘Love potion No.9’이 대표적이다. 영화에서 도철이 미미를 보고 사랑에 빠지는 순간엔 노래 제목대로 사랑의 묘약이 흘러나오듯 감미롭게 퍼지더니, 극의 후반부 도철과 홍기가 도망치듯 떠난 바닷가 장면에서는 조금 더 강한 사운드로 한 걸음 더 나선다.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도 음악이다. 딱히 갈 곳 없는 두 사람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투덕거리는 모습에, 음악은 볼륨을 최대로 키우며 엔딩을 알린다. 이 외에도 체육관에서 두 사람이 우스꽝스러운 댄스배틀을 벌이는 장면에서 흐르는 ‘Wooly Bully’나 ‘Let’s Twist Again’ 등 멜로디를 들으면 흥얼거릴 만한 익숙한 곡들이 많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요소가 있다. 바로 날씨다. 제목부터가 ‘태양’을 직접 가리키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영화에선 유독 도철이 비를 맞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첫 만남 이후 다시 만난 미미와의 첫 대화 직후에, 그리고 이후 두 사람이 사랑을 키워나가던 시절의 데이트 장면에서, 그리고 도철이 미미와의 이별을 직감하게 된 날 역시 비가 내렸다.

그리고 이날, 도철은 비를 맞으며 쉐도우 복싱에 집중한다. 그런 도철의 옆을 자동차로 따르던 홍기는 도철이 링 위에서 타이슨과의 결투라도 하는 것처럼 뻔뻔하게 중계를 읊는다. 홍기에게 단단히 화가 나 있던 도철이었지만, 결국 웃고 만다. 어쩌면 도철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던 이 날들은 역설적이게도 ‘태양이 뜨지 않은’ 날들이었다.

작품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들 두 친구는 셀 수 없이 고난을 반복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웃음 짓는다. 영화는 “깨지고 굴러도 매일 새로운 해는 뜬다”고 말하며 이야기를 끝낸다. 어쩌면 도철의 행복한 순간 마다 비를 뿌려 ‘태양이 없으면 어때. 비가와도 충분히 괜찮다’를 말하려는 지도 모른다. 전작 ‘비트’를 통해 비극적인 엔딩으로 많은 팬들의 가슴을 울렸던 감독은, 이 작품에서 만큼은 이들의 뒷이야기와 해석에 관한 부분을 전적으로 관객 각자의 상상에 맡겼다.

사진=삼성 픽쳐스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촬영이 한창이던 어느 날, 이정재에게 다가온 정호연이 “선배님, 저 어제 ‘태양은 없다’ 봤어요.”라고 하자, 이정재의 대답은 “그걸 왜?”였다고 한다. 20년이 훌쩍 넘은 청춘 영화를 지금 본다고 공감이 되겠나 싶은 마음에서다.

하지만 개봉 당시엔 관객들이 작품에 대한 평가를 공유할 수 있는 플랫폼이 있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면 이 영화는 충분히 MZ세대에게도 흥미로운 작품임이 분명하다. 최근의 평가를 기준으로 집계되는 평점에서 왓챠피디아 5점 만점에 3.3, 네이버 평점 10점 만점에 8.56의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 그 증거다. 극중 홍기가 “저도 이제 스물다섯이에요”라며 허세를 부리는 장면은 누군가에겐 냉소를 안겼겠지만 누군가에겐 부끄러움과 공감을 안겼으리라.

가히 ‘청춘 영화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도저히 왜 인기인지 모르겠다 싶은 사람은 분명히 있다. 잊지 말자. 영화는 1990년대에 만들어졌고, 그땐 이게 ‘먹혔다’. 7-80년대 홍콩 영화 특유의 감성이 있다면 우리에겐 90-00 년대 특유의 감성이 있다. 무엇보다 앳된 모습의 정우성과 이정재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태양은 없다’를 재생할 이유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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